생명과학과가 IT 대기업에 입사하기까지 12 (마지막) - 정규직 전환
인턴 생활이 끝, 남겨진 시간의 공백
마지막 2주 정도는 주말도 없이 인턴 생활에 몰두하다보니, 갑자기 찾아온 시간의 공백은 허전했다.
어느덧 시간은 9월. 이제 새로운 공채가 시작되는 시기다.
벌써 몇몇 대기업은 공채가 시작됐고, 이름 있는 IT 기업들도 공채가 곧 시작이다.
인턴이 끝나자, 다시 취업준비를, 우수수 떨어졌던 그 취업준비를 선뜻 하기 힘들었다.
누군가는 1년 안에 취업을 성공해도 빠른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별로 취업 준비 안 했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고 자신감이 없을까...
우수수 떨어졌던 기억에 두려웠던 걸까.
막상 시간이 다가오면, 어떻게든 흩어진 마음 다잡고 다시 취업을 준비했겠지만...
그무렵 놀랍게도 처음 눈에 들어왔던 것은 W기업이었다.
취준생이 되고 처음으로 인턴 입사를 시도했다가 인터뷰에서 떨어졌던 W기업이다.
조금 새로운 채용이었다, 아니 채용이라기엔 조금 특이한 프로그램이었다.
W기업이 연구재단을 후원하고, 연구재단이 지원해주는 연구 프로그램이었다.
지원해서 선발되면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마지막 문제까지 해결하면 논문과 채용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프로젝트였고, 내가 인턴때 다뤘던 추천과 관련된 프로젝트도 있었다.
재밌어보였기에 자기소개서와 연구 계획을 적고 초안을 완성했다.
인턴 때 했던 경험이 연구 계획에 고스란히 들어가, 인턴이 꽤나 좋은 경험이었구나 느꼈다.
혹시나 인턴이 합격될까봐 자기소개서를 완성시키진 않고 있었다.
게으름 때문이었을까.
인턴 합격을 예상했었나?
내 인턴 생활을 되돌아봤다.
프로젝트의 성과도 찬찬히 곱씹어봤다.
내 실력도 객관적으로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합격 확률은 50%였다.
아니, 정확히는 40-60%에서 기분에 따라 예상 확률이 바뀌었다.
그 정도로 내가 썩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인턴 생활을 같이 한 사람 중에, 내가 인사담당자였으면 놓치지 않을 사람을 몇 명 골랐다.
정말 잘 했던 사람, 확실한 2-3명이 생각났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확실했다.
그리고 나를 떠올렸다.
음... 모르겠다.
나름 열심히 했지만 그들만큼 뛰어나진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뛰어나진 않지만, 적응해서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있었다.
청소년과 대학시절을 돌아봐도 항상 그랬으니까, 난 처음보다 끝을 더 잘했으니까.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라고 자부해왔으니까.
비전공자에 컴퓨터수업 하나 제대로 들은 것도 없고, 컴퓨터시스템과 네트워크, db 등은 하나도 몰랐다.
정보처리기사 자격증도 없고, 당장 딸 수 있을 거란 자신도 없었다.
그냥 재미로 인공지능 공부하고 코딩해서 웹사이트 하나 만든 게 다다.
대학 졸업한 지는 2년이 넘어갔다.
인턴기간 동안 잘했는지 잘 모르겠다.
과연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봤을까?
나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래서, 그 팀에서 일할 수 있을까?
예상보다 빨리 나온 합격 발표
인턴의 정규직 전환 발표는 인턴 종료 후 2주 뒤였다.
그래서 기대 없이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5일 정도 지났을까?
메일 하나가 왔다.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XX팀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해 열정과 노력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XX팀 인턴 프로그램이 좋은 경험이 되었기를 희망하며, 앞으로도 함께 더 좋은 경험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XX팀 정규직 전환에 대한 희망 여부를 답변 해주시면 향후 절차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만약 희망 시기도 얘기해주실 수 있다면 같이 말씀해주세요. |
그냥 인턴을 끝낸 사람 중에서 정규직을 희망하는 사람을 조사하는 줄 알았다.
기껏 전환대상자를 뽑았는데 '나 안 갈래' 하는 사람이 나오면 골치아프니까 미리 대상을 정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사전에 전환을 포기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에이 뭐야, 놀랬네... 나중에 답장해야지' 하고 넘겼다.
그런데 인턴 동기 카톡방에서 심상치 않은 톡이 오갔다.
"저는 안 됐네요... 되신 분들 축하드려요"
"저도 안 됐네요 ㅠㅠ"
(이 카톡 이후, 동기 카톡방은 조용해졌다.)
'뭐지?!?!'
다시 보니 '앞으로도 함께'라는 문구가 보였다.
아, 합격이구나.
아...!
당장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나, 합격이라고, 이제 취업한다고.
쉼표,
지금 되돌아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고등학교 때 문이과를 고민하며 여러 성격, 적성 검사를 거치며 이과를 선택했다.
수학에 스트레스 받으며 공부하다 수능 망하고, 수시로 어찌어찌 이공계에 특화된 대학에 간다.
뇌과학 한답시고 생명과에 들어간다.
전공은 재밌는 것도 있었지만, 질리고 수업 방식이 재미가 없어서 학점은 교양보다 못했다.
잠깐 해본 코딩이 재밌어서 혼자 컴퓨터로 이것저것 만들었다.
인공지능을 알게 되고 혼자 인터넷 보면서 공부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뭔가 만든 것들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쓸모가 많지 않았다.
생명과 대학원 포기하고 졸업한 뒤 바로 군대 갔다.
백수로 전역한단 생각에, 군대에서 그나마 재밌던 컴퓨터 공부했고 진로를 그쪽으로 정한다.
전역 하자마자 상반기 공채 시즌, 취업 준비를 나름 열심히 했지만 대기업 우수수 떨어진다.
마지막에 딱 하나 붙은 인턴, 정규직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인턴에 빚까지 만들고 자취 시작.
인턴생활.
그리고 정규직 전환.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운 좋은 인생이 있을까 싶다.
지금은 합격발표를 들은지 세 달 정도 지났고, 정규직으로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우리팀에 한 달 뒤면 인턴이 들어온다.
그 사람 중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겠지.
없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겠지.
"나한테 행복을 주고 재밌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지"
"재밌는 일만 하면서도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이제 시작이지만, 나처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응원해주고 싶다.
믿음을 주고 싶다, 할 수 있다고.
힘들겠지만, 힘내라고.